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ag of milk (문단 편집) ==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소녀 [*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690020817 을 동의하에 발췌번역함.]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본능(원초아, 이드)과 현실 간의 괴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본능을 억압하는 것은 일반인 - 신경증 환자의, 신경증적 반응이다. 본능을 억압하지 못하는 것은 정신질환적 반응이다. 본능을 억압하지 못하는 개인은 현실을 억압, 즉 부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에 따라 정신질환자는 본능적 갈망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 시도한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는 본능에 따라 생각, 표현, 갈망 등이 변화하는 정신질환적 '''망상'''을 뼈대로 삼는다. 이 세계의 존재를 이어나가게 하는 것은 '''환각'''의 몫이다. 소녀는 자신만의 약이 효과가 있다고 '''망상'''하며, 이에 따라 실제로 몸의 곳곳이 나아지는 '''환각'''을 느낀다. [*레퍼런스1 Freud, The Loss of Reality in Neurosis and Psychosis, 1924 ]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소녀의 세계가 왜 그토록 끔찍한지를 이해할 수 없다. 라캉의 관점에서, 정신병은 억류가 가져오는 현상이다.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어머니는 아이와 거리를 두게 되며, 동시에 '아버지의 이름'은 아이가 광활한 언어의 세계에서 자리를 잡는 구심점이 된다. 이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아이는 언어의 상징계 속에 표류하며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연결짓지 못하게 된다. 정신질환자는, 이 '아버지의 이름'이 억류된 것이다. 소녀는 이런 '아버지의 이름'을 다양한 물체로 대체하고 있지만, 아직 그 물체의 무게는 충분치 않다. (소녀의 'O'에 대한 공포를 상기하자.) 신경증 환자가 언어를 지배한다면, 정신질환자는 언어에게 지배당한다. 언어의 상징계에는 '타자'가 살고 있다. '타자'는 말과 언어가 발아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의식을 넘어 '타자'에게서 오는 것이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화이다. 우리가 내뱉는 모든 문장은 언어가 담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짊어지고 있다. 이 얽히고 설킨 맥락의 거미줄은 '타자'의 현현이다. 우리가 '타자'가 살고 있는 곳, 즉 언어를 배워갈 수록, 그 언어는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형성해간다. 이러한 '타자'를 처음으로 짊어지고 있는 자는 어머니이다. 아이의 원초적인 울음소리에 의미를 부여해 가둬버리는 것이다. 정신질환자는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다. 타자 욕망은 정신질환자에게서 분리되어 이질적으로 변한다. 이 이질적인 욕망은 정신질환자 개인이 이해할 수 없으며, 개인의 주이상스(일종의 만족, 후술함)이 아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그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소녀가 갖는 'O'에 대한 공포는 타자 - 'the Other' - 에 대한 공포이다. 라캉에 따르면, 아기는 어머니의 욕망을 두려워한다. 어머니는 아기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취급하고자 하는가 하면, 자신의 아이를 통해 주아상스를 얻고싶어하는 욕구를 갖는다. 어느 쪽이든, 어머니는 아기를 흡수코자 하며, 아기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막는다. 이러한 어머니의 욕구를 막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집어삼키고자 한다. (혹은 소녀는 그러한 망상을 본다.) 어머니가 그토록 기괴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유로는, 소녀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는 단서는 많지 않지만, 이것이 어느정도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레퍼런스2 Brenner, L.S., The Autistic Subject: On the Threshold of Language, 2020; Fink, B., A Clinical Introduction to Lacanian Psychoanalysis, 1999; Lacan, J., Seminar III : The Psychoses, 1993; Vanhuele, S., A Lacanian perspective on psychotic hallucinations, 2011 ] 첫번째 죽음에서, 대화문은 이렇게 진행된다.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뭘 생각한 거야?) >-무슨 말이야?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아무 것도 모르겠어. 이건... 이상하네.) 목졸림 장면 포함 >혹은 >(...) 목졸림 장면 없음 플레이어가 소녀의 생각을 모르겠다고 하자마자, 소녀는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경험을 한다. 라캉에 따르면, 환각의 정의는 '지각하는 자에게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지각'이다. 풀어서 설명해보자. 우선, 지각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정신적인 상이며, 지각하는 자는... 지각하는 자이다. 라캉은 환각 증상을 겪는 환자들이 다른 정신 상태와 큰 연관이 없다는 것을 기록했다. 환각은 환자가 자신의 다른 경험과 엮으래야 엮을 수 없는 지각인 것이다. 역설적이다. 소녀는 어떤 종류의 역설에 직면했는가? 1. 플레이어는 환각이며, 소녀의 일부이다. 2. 플레이어라는 환각은 소녀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소녀의 일부가 소녀의 다른 일부를 이해하지 못한다.) 3. 플레이어라는 환각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말로 풀어 직접 드러냈다. 1번과 2번 사이에서, 소녀의 상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났으며, 이 역설은 3이 발생하는 즉시 '첫번째 죽음'을 촉발한다. 게임 내부의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라캉은 정신병의 첫 순간에 중심이 되는 것은 질서의 급격한 소멸과 붕괴 또는 공허의 경험이라고 기술했다. 게임 내에서, 소녀가 목이 졸린 후에,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적색과 흑색의 무질서한 나열이다. 라캉은 그 순간에 주체의 '''죽음'''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레퍼런스3 Lacan, J., On a question prior to any possible treatment of psychosis, in Écrits, 2006; Vanhuele, S., A Lacanian perspective on psychotic hallucinations, 2011 ] [[파일:milk chan hates o.jpg ]] 소녀의 스웨터에는''' ∅ '''형상이 그려져있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S[∅]'''는 타자에 난 구멍을 의미하며, 그곳에는 존재가 위치해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약간 어려운 얘기를 해보자. 자신이 갓난아이라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며, 사실 자신이라는 단어조차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배가 고플 때면 당신은 운다는 것과, 당신이 울면 어머니(의 젖)이 온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당신은 자신과 어머니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세계는 그저 혼돈일 뿐이다. 필연적으로, 갓난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든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3단계로 구분한다. 1. 아이는 어머니가 아이 외에도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예를 들어, 상상적 팔루스(남근) 같은 것. 그리하여 아이는 어머니를 위해 팔루스가 되어주고자 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당신 말고 다른 것들도 원하며, 가장 큰 예는 아버지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도 원하는가? 이 상상적 팔루스(실제 남근이 아니다)은 아이가 어머니가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이 되려 하는 것이다. 2. 상상적 아버지가 개입해 근친상간을 금기로 선포하여 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과도한 애정을 멈춘다. 전술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이 단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확립된다. 상상적 아버지는 실제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으로 구성된 아버지의 모습으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3.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에게 팔루스가 있음을 보여주며, 그로써 아이는 팔루스가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NTR]]이다. 이 첫 번째 [[NTR]]을 라캉은 "상징적 거세"라고 칭한다. 상상적 팔루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 팔루스 형상의 구멍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상상적 팔루스가 필요하며, 따라서 상상적 팔루스는 "주이상스"의 원천이다. 주이상스는 주체를 이끄는 과도한 즐거움이며,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락이다. 주체가 즐거움의 제한을 계속해서 위반할 때, 주체는 즐겁기보다 고통스럽다. 견딜 수 있는 즐거움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거세의 과정에서, 주체가 어머니의 상상적 팔루스가 되려는 시도를 멈췄으므로, 주이상스가 금지된다. 역설적으로, 주이상스가 금지될 때 우리는 주이상스를 애초에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가 '금지'될 때는, 보통 개인에게 금지된 행동을 할 능력이 있을 때다. 하지만 이 금지는 속임수이고,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금지함으로써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을 평생토록 추구하도록 속인다. 우리는 이것을 "오브제 쁘띠 아" 또는 "대상 a"라고 부른다. "대상 a"는 욕망이 나오는 원천이며, 우리가 이후에 추구하는 듯 보이는 것은 "대상 a"에 유사한 열화품일 뿐이다. 우리는, 진정한 욕망의 원천을 갖지는 못하기에, 끊임없이 유사품을 모으는 수집가로 살아가게 된다. [[파일:thatOagain.jpg]] 다시 게임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이야기의 시작은''' S[∅]'''는 존재가 위치한, 상징적 타자의 결핍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소녀가 생각하기로는) 상징적 타자(이 경우에는 어머니가 타자일 것이다)의 결핍이야말로 상상적 팔루스이며, '오브제 아'였던 것이다. 존재라는 말도 이해하기 쉬워진다. 라캉은 존재가 상징적 질서에 기반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의를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타자와 마찬가지로, 부존함으로 점철되어있으며, 주체는 이런 존재의 부존에 기반하고 있는 고로 욕망이 생성된다. 정리하자면, 욕망은 존재에 대한 갈구이다. 갓난아이가 바라보는, 자신이라는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혼돈의 세계를 기억하는가? 이러한 결핍과 욕망을 통해, 아이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되고 싶다" 라고. 스웨터의 ∅ 표시는, 따라서, 소녀의 이러한 발언이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나다.''' '아버지의 이름'이 억류되는 얘기를 기억하는가?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2번째와 3번째 단계가 소녀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소녀는 아직까지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레퍼런스4 Evans, D.,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1996; Evers Brothers Productions, Objet Petit a: The Object-cause of Desire; Monkayo, R., Knowing, Not-Knowing, and Jouissance, 2018; Owens, C. and Cox, O., Studying Lacan’s Seminar VI Dream, Symptom, and the Collapse of Subjectivity, 20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